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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9월 19일 - 초대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역사관(2) 등록일 2017.09.27 22:15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2596
-건국절 논란과 건국기원절

지금 일부에서 다시 대한민국 건국절을 가지고 논란하고 있다. 현 정부에서 1919년 4월 11일을 건국절로 제정하려 하자 뉴라이트 및 일부 야당·언론들에서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독립운동에 나섰던 선조들은 대한민국 건국절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상해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1919년 4월 11일이지만 이 날짜보다 보다 중요하게 여긴 것은 건국기원절이기 때문이다. 건국기원절이란 국조 단군이 민족국가를 건국한 날, 즉 지금의 개천절을 말한다. 기미독립선언서의 선언 날짜가 4252년 3월 1일인 것이 이를 말해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전부터 이미 이 나라의 건국기원은 서기전 2333년이라는 사실이 모든 독립운동가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상해 임정의 건국기원절 제정

1920년 3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제1회 정기총회를 열어 10월 3일을 건국기원절로 정했다. 이때 논란이 된 것은 원래 10월 3일이 음력이라는 점이었다. 대한민국은 양력을 쓰기 때문에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매년 건국기원절이 바뀌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력 10월 3일을 건국기원절로 정해서 법제심의위원회로 넘겼다. 사실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고 하는 것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부른 것처럼 건국기원절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단군의 신하들

성재 이시영 선생은 『감시만어(感時漫語)』에서 당연히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설명했다. 단군이 우나라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임금이 되었고, 그의 아들 부루(扶婁)가 하우(夏禹)와 도산(塗山)에서 회맹하고 국경을 정한 것이 한·중 두 나라가 화합하고 결합하는 시초라고 말했다. 단군 조선의 경계가 지금의 북경 지역인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였다고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이시영 선생에 따르면 단군의 조정에서는 원보(元輔:영의정) 팽우(彭虞)가 산천과 토지를 보호 관리하는 일을 맡았고, 사관 신지(神誌)가 서계(書契)를 찬술하는 일을 맡았고, 농관(農官) 고시(高矢)가 밭농사를 주관했다는 것이다. 이시영 선생은 고시씨에 대해서는 “한민족의 풍습에 들에서 농사지으며 음식을 먹을 때 먼저 밥 한 술을 떠서 고시씨(高矢氏:고시레)하고 던지는 것은 그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단군의 태자 부루가 도산에서 중국과 회맹했다는 이야기나 팽우·신지·고시에 대한 설명, 그리고 단군의 부인이 비서갑(匪西岬)이라는 내용 등은 『환단고기』의 설명과 일치한다. 『환단고기』가 진서인지 위서인지는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이땅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1979년에 위조했다는 따위의 주장은 근거가 없음이 1934년에 쓴 『감시만어』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의 주요 내용들은 적어도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널리 공유된 내용이었다.

-이유장의 『동사절요』

그 이유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런 역사관이 그때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팽오, 신지, 고시 등 단군의 신하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조선총독부의 눈으로 한국사를 보는 학자들은 믿지 못하겠다고 나오겠지만 이런 내용은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다. 경상도 안동 출신의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1625~1701)이라는 조선 중기 학자가 쓴 『동사절요(東史節要)』라는 책이 있다. 이유장은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공조좌랑(佐郞)까지 역임한 인물인데, 그가 쓴 『동사절요』의 1권 ‘군왕본기’에 부루(扶婁)에 대한 이야기가 이미 나온다.
“부루(다른 본에는 해부루라고도 되어 있다)는 단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비서갑으로 하후씨의 딸이다. 수토를 다스리기 위해서 제후들이 도산에서 만나 옥백을 가져가 서로 만날 때 부루가 가서 회맹했다(외교의 시작이다). 부루의 자손이 기자를 피해 북부여를 세웠다(영토를 양보한 시작이다) 환인(桓因)의 신시(神市)의 시대에 대해서는 상고하지 못했다(이유장, 『동사절요』)” 
“扶屢(一作解夫婁) 檀君之子 母非西岬女夏后氏 平水土會諸侯於塗山 相見以玉帛 扶屢往會(外交之始) 扶屢之子孫避箕子立爲北扶餘(讓土之始) 桓因神市之世 無所攷(『東史節要』 卷1 君王紀 第1 扶屢)”
-조선 학자들의 고대사관
17세기 때 학자 이유장은 『동사절요』에 단군의 왕후가 비서갑이며 그 아들 부루가 도산회맹에 참석했다고 썼다. 이때 (고)조선과 중국이 처음 외교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이시영 선생이 부루가 도산에서 회맹하고 한·중 두 나라의 국경선을 획정했다고 쓴 것과 일치한다. 또한 이유장은 부루의 자손이 기자를 피해서 북부여를 세운 것이 영토를 양보한 시초라고 썼다. 그러면서 환인의 신시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서 상고하지 못했다’라고 썼으니 위의 내용들은 모두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썼다는 뜻이다. 
이는 비단 이유장 뿐만 아니라 소론계 학자인 이종휘(李鍾徽:1731~1797)도 『수산집(修山集)』에서 “단군이 비서갑 신녀를 취했다(檀君娶匪西岬神女)”라고 써서 단군의 부인이 비서갑이라는 사실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조선 학자들 사이에 꽤 알려진 이야기였음을 말해준다. 이 외에도 우리가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적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그렇지 성재 이시영 선생이 1934년에 쓴 『감시만어』나 『환단고기』에만 나오는 것 같은 이야기들을 조선 시대 선비들의 문적에서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세조 때의 서적 수압령

세조는 재위 3년(1457) 5월 26일 서적 수압령을 내려서 고조선 및 우리 민족정신과 관련된 책들을 관에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중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조대기(朝代記)』 및 두 종류의 『삼성기(三聖記)』 등도 들어 있는데, 『고조선비사』나 『조대기』는 고조선의 비사와 고조선의 연대기일 것이 분명하다. 또한 『삼성기(三聖記)』는 환인·환웅·단군의 삼성에 관한 서적이 분명하다. 나는 이때 관에 바치지 않은 서적들이 일부 사대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전해지다가 이유장이나 이종휘의 글 등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이종휘가 소론계 인사이고, 이시영도 소론계 집안이라는 점에서 이런 추론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평안도 관찰사까지 역임했던 성재 이시영 선생이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망명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독립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우리 역사의 뿌리부터 바로 세운 역사관에 있었다. 지금 내외우환에 시달리는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 또한 우리 역사의 뿌리부터 바로 세우는 바른역사관 수립에 있다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정권이 바뀐 후에도 국립박물관 등에서 “삼국사기는 가짜”, “가야는 임나” 따위의 강연을 하는데 국고가 지원되는 형편이니 이시영 선생께서 부통령으로 계신다면 지팡이 들고 쫓아가 “이 역적놈들!”이라고 강사들과 관계공무원들을 내려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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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부통령 시절의 이시영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