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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9월 14일 - 백탑파와 공부의 길 등록일 2017.09.27 22:13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2664
-큰절골의 선비들

조선 후기 최고의 학자집단은 지금의 서울 종로 2·3가 일대에 살던 백탑파였다. 과거 흥복사가 있던 자리에 세조가 원각사를 세우자 이 일대를 우리말로 ‘큰절골’, 한자로 ‘대사동(大寺洞)’이라고 불렀다. 원각사에 흰색의 10층 백탑이 있어서 일대를 백탑(白塔)이라고 불렀다. 영조 43년(1767) 이덕무가 백탑 부근으로 이주하면서 그와 친한 사람들이 하나, 둘 이곳으로 이주하거나 자주 찾았다. 이덕무가 서얼이었기 때문에 몰려든 사람들도 박제가·유득공·서상수·윤가기·이희경처럼 대부분 서얼들이었는데 이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었고, 이들을 백탑파라고 일렀다.
-굶기를 밥먹듯하던 서얼출신 선비
양반의 나라 조선에서 서얼들이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는 사실이 그 시대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지금의 식민사학 카르텔처럼 양반 사대부들의 학문 독점은 깨진지 오래였지만 양반 카르텔로 지배계급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런 사회에서 서얼 출신 지식인들은 가난을 벗 삼아 공자가 말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실천했다. 이덕무의 호는 청장관(靑莊館)인데, ‘청장’은 눈앞에 있는 먹이만 먹고 사는 해오라기 종류의 물새다. 그렇잖아도 가난한 서얼이 청장이란 호를 가졌으니 굶기를 밥 먹듯 했던 것은 당연했다.

-책만 보는 사람, 이덕무

사람들은 이덕무를 ‘간서치(看書痴)’라고 불렀다. 책만 보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덕무는 스스로 「간서치전(看書痴傳)」을 지었는데, 여기에서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지만 동창⋅남창⋅서창의 세 창이 있었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따라가며 책을 보았다.”라고 썼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서얼이란 이유로 쓰이지 못하고 곤궁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덕무에게는 이런 세태를 초월하는 고고한 인품이 있었다. 
“지난겨울 내 작은 초가가 너무 추워 입김이 서려 성에가 되었고, 이불깃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내가 게으른 성격이지만 밤중에 일어나 창졸간에 『한서(漢書)』한 질을 이불 위에 죽 덮어서 조금 추위를 막았다. 이러지 않았다면 후산(後山)의 귀신이 될 뻔했다.(이덕무,『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후산(後山)은 송(宋) 나라 사람 진사도(陳師道)의 호인데, 추운 겨울날 솜도 들어가지 않은 얇은 옷을 입고 교사(郊祀:국가제사)에 참여했다가 한질(寒疾)에 걸려 죽은 인물이었다. 이덕무는 『한서』 한 질을 이불 위에 덮는 임기응변으로 진사도와 달리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고 자위하는 것이었다.

-양반 출신 백탑파, 박지원

그러나 백탑파가 서얼들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이덕무가 백탑 부근으로 이주한 다음해인 영조 44년(1768) 박세채의 후손인 양반 출신 박지원(朴趾源)도 이곳으로 이주했다. 박지원이 이주한 이후 이서구(李書九)같은 왕가 혈통들도 자주 백탑을 찾아서 백탑은 신분에 상관없이 진정한 지식을 갈구하는 학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영조 45년(1769) 박제가가 박지원을 찾아가서 남긴 일화는 박지원이 어떤 인물인지를 잘 말해준다. 박제가는 자신의 짤막한 전기인 「소전」에서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멀리 한다.’고 말한 것처럼 자존심 센 서얼이었는데, 이덕무의 추천으로 박지원을 찾았다. 박제가가 왔다는 말을 들은 박지원은 옷깃도 채 여미지 않은 채 뛰어나와 반기고, 자신이 직접 밖에 나가서 몸소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익숙한 솜씨로 다관(茶罐)에 쌀을 넣고 밥을 하는 박지원을 바라본 박제가는 비로소 이덕무가 박지원을 추천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로 신분이 다르지만 이렇게 서로를 알아주고 뜻이 맞는 지기(知己)가 되었다.

-박지원의 낙랑군 위치비정

양반 카르텔을 박차고 나와 서얼들과 지기가 되었던 박지원이기에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도 진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열하일기』, 「도강록」에서 『당서』 ‘배구(裴矩)열전’을 인용해,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라면서 “고죽국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다”고 썼다. 청나라 영평부는 곧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으로서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자리였다. 박지원은 같은 책에서,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라고도 갈파했다.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기자가 온 동쪽 조선을 평양이라고 믿고 있을 때 열린 지식인 박지원은 그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 평양이라고 갈파했다. 지금 살아 있으면 식민사학자들과 그 카르텔 언론으로부터 ‘사이비, 유사역사학자’란 욕깨나 얻어 먹었을 것이다.

-규장각 4검서

정조는 실력이 아니라 신분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 풍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즉위 초 개혁 문신 양성 기구인 규장각(奎章閣)을 설립하고, 검서관(檢書官)에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리수 4명을 임명했다. 『정조실록』 3년(1779) 3월 27일자에, “내각(內閣:규장각)에 처음 검서관을 두었는데 서류(庶類:서자들) 가운데 문예(文藝)가 있는 사람으로 차출하여 4원(員)을 두었다.”라고 전하는 것처럼 이들은 모두 서얼들이었다. 신분제의 벽이 한번 타파되고, 검서관에 등용되자 이 네 명의 서자들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 후기의 학문·사상계를 주도했다. 청나라의 발전된 현실을 인정하자는 ‘북학파’라는 실학의 한 흐름, 이용후생학파는 바로 이들 서얼 지식인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진정한 공부의 길

지금 ‘한사군=한반도설’이나 ‘가야=임나설’ 따위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설(虛說)들이 식민사학 카르텔과 그와 한 몸인 언론 카르텔에 기생해 생존을 도모하고 있다. 자신들의 주장이 일체의 1차사료적 근거가 없는 조선총독부 정치선전술의 반복이기에 이들의 대응은 그토록 거칠다. 학문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태일수록 답은 공부에 있다. 백탑파의 정신을 지향하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가을 강좌를 시작한다. 공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라고 말한 것처럼 학문은 일관되어야 한다. 현대사는 진보라면서도 고대사는 총독부의 시각으로 보고, 조선사는 노론의 시각으로 보는 분절적 사고 등은 그 허구성이 드러나면서 점차 살 길을 잃어가고 있다. 체계적인 공부로써 스스로 지식인이 되는 것이 비록 몸은 가난할지 몰라도 정신은 부자로 사는 길이다. 다 같이 진실을 찾아서 공부하는 도반(道伴)의 길을 걸읍시다

※일반강좌: 10월 16일~12월 18일(매주 월요일 오후 7시~9시) 
전문강좌(한문원전해석 강좌): 10월 12일~12월 14일(매주 목요일 오후 7시~9시)
(강의 접수 및 문의:02-711-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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