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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8월 14일 - 8·15는 누구에게 가장 큰 축복이었는가? 등록일 2017.09.27 21:47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2020

-노신과 아Q정전

본명이 주수인(周樹人)이 문학가 노신(魯迅:루신)은 한국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이회영 등과도 깊은 교분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래서 중국 인민일보에 근무하는 노신의 손자가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찾아온 적도 있다. 국적은 다르지만 함께 항일운동을 했던 인연으로 세교(世交)를 이어가는 것이다. 노신의 고향은 절강성 소흥(紹興)인데 중국의 특색음식 중 하나인 취두부가 유명한 곳이다. 몇 년 전 ‘노신 고리(故里:고향)’라는 소흥을 찾았을 때 입구에서부터 풍기던 취두부의 냄새가 지금도 생각난다. 
노신을 중국의 국민작가 반열에 올린 작품은 역시 「아Q정전」이다. 신해혁명을 전후한 시기 정확한 성명도 모르는 최하층 날품팔이 농민 ‘아Q’의 일생에 대해서 쓴 작품이다. 아Q는 이상과 현실의 극단적 괴리를 겪는 인물이다. 스스로는 자존감이 강하지만 동네 깡패들에게 맞고 다니는 신세고, 반면 자기보다 약한 아이나 여성들을 모욕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신해혁명 후 사람들이 혁명당을 두려워하자 혁명당에 들어가려 하지만 혁명당원에게 무시당한다. 결국 좀도둑으로 몰려 총살당하는데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이 사형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실에서 겪는 모든 모욕과 패배를 정신적 승리로 승화시키는 ‘정신 승리법’에 익숙한 인물이다. 아Q가 총살당한 후 세상은 마을에 군림하는 지주 조가(趙家)가 다시 지배한다. 아Q만 죽었을뿐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는 것으로 아Q의 일생을 통해 당시 중국 사회의 병근(病根)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중화사상과 신해혁명의 뒤끝

「아Q정전」은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현실적으로는 늘 패배하면서도 ‘정신적 승리’ 운운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던 중화사상에 메스를 대었기 때문이다. 노신이 이 작품을 구상한 것은 신해혁명의 실패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나 또한 이 작품의 가치는 신해혁명을 바라보는 노신의 혜안에 있다고 본다. 1911년 10월 손문(孫文: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은 청조 타도에 성공하면서 손문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남경(南京)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청조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은 북양(北洋)군벌의 원세개(袁世凱)와 타협하는 바람에 1913년 원세개가 대총통이 되고, 혁명은 급격하게 반혁명으로 전환되었다. 신해혁명은 배신당한 혁명이 되었고, 혁명의 격랑이 휩쓸고 지나간 후 세상은 다시 지주 조가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8·15는 누구에게 해방이었는가?

우리도 지금 같은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 1945년의 8·15 해방은 과연 누구에게 해방이었는가?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일본인 학자들의 귀여움 받는 한국인 제자였던 이병도나 신석호에게 일제의 패망은, 다른 친일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병도는 해방 후 진단학회 이사장은커녕 제명운동이 벌어질 정도로 곤혹을 치렀다. 그러나 백범 김구 주석이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아! 왜적의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 간 애를 써서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모두 헛일이다”라고 탄식한 것처럼 곧 사태가 역전되었다. 
미 군정이 친일파를 중용하고,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들에게 권력을 주어 거꾸로 독립운동가들을 숙청하면서 이병도는 회생했다.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병도는 군사정부 기관지 『최고회의보』 창간호에 「5ㆍ16군사혁명의 역사적 의의」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쿠데타를 칭송했고,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가 되었다.

-친일파에서 국사학계의 태두로

일본인들이 계속 지배하고 있었다면 이병도는 일본인 스승들의 귀여움을 받는 보조학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8·15해방으로 일본인들이 쫓겨간 빈자리를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들이 아니라 이병도·신석호 같은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차지하면서 대역전이 일어났다. 이병도는 한국사의 태두로 불리면서 1981년까지 근 20여년간 대한민국 학술원 원장을 역임했다. 이런 나라에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상 외에 노벨상 수상자 한 명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신체는 해방되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일본인들이 만든 식민사학의 노예상태에 머물러 있는 나라에서 독창적 학문이 꽃필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은 일제를 구축한 후 공산당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당도 친일에 앞장 섰던 한간(漢奸)들을 광범위하게 숙청했다. 반면 우리는 해방 후 반민특위가 좌절되면서 사실상 단 한 명의 친일파들도 숙청하지 못했다.

-흙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추는가?

이 때문에 일본 극우파들은 아직도 호시탐탐 이 나라를 노린다. A급 전범 출신이 만든 일본 극우파 사사카와 재단은 막대한 돈을 뿌려 친일학자들을 양성한다. 고 최재석 고려대 교수께서 “일본에 유학가는 것은 좋은 데 절대 역사학 학위는 받을 생각을 말라”고 신신당부한 것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양성했고, 해방 후에는 일본 자금으로 양성된 친일사학자들이 21세기 백주 대낮에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전파할 때 이를 비판해야 할 『역사비평』은 독립운동가들의 역사학을 ‘사이비역사학’ 운운하며 공격하고, 『한겨레 21』은 “이것이 진짜 고대사다” 따위의 제목으로 총독부 역사관을 버젓이 전파한다. 이 모든 것이 배반당한 8·15의 단상이다.

-조가의 지배체제 종식되어야

광복절이 되면 여기저기에서 광복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질문들을 던질 때가 되었다. 8·15는 누구에게 가장 큰 축복이었는가? 평생을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혁명가들이었는가? 친일파들이었는가? 지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누구인가? 이 친일지배 세력을 떠받치는 구조는 무엇인가? 자신은 이 구조의 일원이 아닌가? 이런 질문에 솔직하게 답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72주년 광복절이다. “흙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며 일제의 패망에 덩실덩실 춤췄던 위당 정인보 선생의 역사관을 우리는 계승하고 있는가? 일제 패망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느꼈던 두계 이병도의 역사관을 계승하고 있는가? 여전히 조가가 현실을 지배하는 한 진짜 광복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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