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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9월 1일 - 임종국 선생과 『친일문학론』 등록일 2017.09.27 22:01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1959
-20년 후에 돌아온다던 일본군

1990년대 친일문학론 열풍을 일으켰던 임종국 선생은 『실록 친일파(1991, 돌베기)』에서 자신의 인생이 바뀌게 된 중학생 시절의 한 기억에 대해서 서술했다. 지금 읽어도 생생하다.
「1945년 8월 말에 나는 17세 중학생이었다. 미군 진주 전이라, 무장해제가 안 된 일본군 부대가 교정·강당 등에 며칠간 쫓겨와 있었다. 총질로 연못의 고기를 잡는 광경이 신기해서 구경하고 있는데, 병사 한 놈이 내게 물었다.
“우리는 전쟁에 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 조선이 독립하게 돼서 기쁩니다.”
순간 병사는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초리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나는 얼른 변명을 했다.
“그렇지만 당신네 일본이 전쟁에 진 것은 정말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병사는 한참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씹어뱉듯이 내게 말했다.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
그로부터 꼭 20년 후인 1965년 여름,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그 여름은 뜨거운 여름이었다.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더니, 정말 20년 만에 그 쪽발이 놈들이 다시 몰려오게 되는구나! 그놈들은 일개 병사조차도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장관이란 사람이 “제2의 이완용이가 되더라도” 타령을 하는 판이었다. 이완용이가 될지언정 한일회담을 타결하겠다면,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이란 말인가? 
회담이 타결도 되기 전에 그런 타령부터 나온다면, 그것이 타결된 후의 광경은 뻔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밀 듯이 일세(日勢:일본세력)는 침투해 올 것이요, 거기에 영합하는 제2의 이완용이, 제2의 송병준이, 제2의 박춘금이가 얼마든지 생겨날 것이다. 묵은 친일파들이 비판받는 꼴을 본다면 제2의 이완용·박춘금이 그래도 조금은 주춤하겠지? 이런 생각에서 나는 『친일문학론』을 쓰기로 작정했다(임종국, 『실록 친일파』)」
임종국 선생이 지금 살아서 한국의 매국 갱단사학계와 그 언론 카르텔의 현실을 보셨다면 서슴없이 『친일사학론』에 대해서 쓰겠다고 마음먹지 않았을까? 일면식도 없었음에도 내 항소심 재판정에 오셨던 임종국 선생의 여동생 분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이용구, 동학맹장에서 친일주구로

역사를 조금만 연구하다 보면 ‘역사에서 변절은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임종국 선생은 『실록 친일파』에서 「매국에 앞장 선 보수는 쌀 몇 되 값-‘일한 병합 청원서’낸 이용구-」라는 항목에서 이용구(李容九:1868~1912)를 다뤘다. 그 아애 소제목이 ‘항일동학군 장수였던 이용구’와 ‘친일파로 변모한 이용구’다. 한때 동학 맹장이었던 이용구는 훗날 노론과 누가 나라 팔아먹는데 더 큰 공을 세우는가 경쟁하는 일진회 회장이 된다. 이용구는 동학의 제2차 봉기 당시 손병희 휘하의 우익장으로 논산 전투 때 동학군 5만 명을 지휘했던 동학의 맹장이었다. 이때 패전해서 왼쪽 허벅다리에 총상을 입고 겨우 도주했다. 이용구는 1898년 체포되었을 때 동학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행방을 대라는 모진 고문에 저항하다 왼발에 골절상까지 입었을 정도로 항일투사였다. 
이용구가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한 것도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이용구를 주목한 일본인들이 일본의 작전군 참모부장 마쓰이시(松石安治) 대좌와 일제 주차군 참모장 사이또 중좌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인들은 일본에 온 한국인들을 회유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또한 ‘대동아주의’니 ‘아시아주의’니 하는 그럴듯한 구실로 구슬려 전향시키거나 간첩으로 쓴다.

-일진회의 탄생

러일전쟁을 앞둔 일제는 이용구의 ‘진보회’와 송병준의 ‘일진회’를 통합시켜 ‘(합동)일진회’를 출범시키고, 이용구를 일진회 13도 총지부장으로 삼았다. 이후 일진회는 러일전쟁 때 무려 26만 명의 한국인들을 동원해서 일본군의 철도건설과 군수품 운반을 원조했다. 의암 손병희는 어느덧 동학교단에 친일파들이 대거 포진했다는 사실을 알고 천도교를 창설해서 이용구 등 62명의 간부들을 교단에서 내쫓았다. 그러자 이용구는 시천교를 만들어 대항했는데 통감부의 비호로 한때는 손병희의 천도교를 능가하기도 했다. 임종국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1894년의 동학 기병 때 항일의병장이었던 이용구가, 13년 후인 1907년에는 일진회장과 친일 시천교주를 겸하면서 통감부의 비호 아래 손병희를 능가하는 세력이 된 것이다……손병희의 정통적 민족파 세력은 (천도교의) 견제세력으로 분립 육성된 일진회와 시천교에 눌려서 현저하게 위축세를 보였다(『실록 친일파』)”

-역사에서 변절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 내부에서 ‘병합’을 요청해서 마지못해 한국을 합병했다는 명분을 갖고 싶어했다. 여기에 앞장선 것이 이용구와 송병준의 ‘일진회’였다. 그래서 일진회는 집권 노론과 매국경쟁에 나섰다. 1909년 12월 초 일진회는 「한일합방 청원서」를 순종과 조선통감 소네, 일본 의회 등에 보냈다. 빨리 한국을 먹어달라는 청원서다. 이에 대해 「대한매일신보(1909년 12월 7일자)」는 “일진회는 이미 일본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므로 어떤 악한 행동을 하더라도 한국민의 행위가 아닌 것으로 인정한다.”고 비판했다. 
일진회의 전신 중의 하나가 이른바 ‘진보회’라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많다. 지금 일부 짝퉁 진보 언론들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옹호하는 것에 충격 받은 사람들이 많은데 ‘역사에서 변절은 다반사로 일어난다’는 흔한 사례의 하나에 불과하다.

-민족과 국가와 철학을 제거하면 무엇이 남는가?

임종국 선생은 『실록 친일파』 서문에서 “‘민족’과 ‘국가’와 ‘철학’을 몽땅 거세할 때 문학에서 무엇이 남는가?”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일진회의 이용구·송병준에게 ‘민족’은 야마토민족이었고, ‘국가’는 대일본제국이었고, 철학은 황국철학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이용구의 기일(忌日)에는 일본의 극우단체들이 제사를 지내준다. 이용구 같은 종자들이 한국의 인문사회학계와 언론계에 다수 포진한 결과 한국 민족주의가 마치 큰 죄나 되는 것 같은 분위기까지 일각에서 형성되어 있다. 모두 일본 극우파 자금으로 유학 갔다 온 외형만 한국인들이 퍼뜨린 바이러스에 불과하다. 서구 민족주의나 일본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일치하니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 민족주의는 일본의 극우 민족주의에 맞서 싸운 저항의 이념이다. 단재 신채호, 백범 김구, 석주 이상룡, 도산 안창호, 소앙 조용은, 단재 신채호 등등………일본의 극우 민족주의 및 이승만 극우 파시스트 정권과 평생을 걸고 싸웠던 한국 민족주의자들 그 누구의 인생이 부정의 대상이 되겠는가? 그래서 임종국 선생이 했던 질문을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옹호하면서 한국 민족주의와 한국사를 비하하는데 열심인 사람들에게 던진다. “‘민족’과 ‘국가’와 ‘철학’을 몽땅 거세할 때 역사에서 무엇이 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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