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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7년 8월 30일 - 1910년 8월, 망국 전후 풍경 등록일 2017.09.27 22:00
글쓴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조회 2173

-가해자는 없는 역사

우리 사회는 정약용을 훌륭한 위인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이 위인의 인생이 왜 이렇게 비참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가 스스로 좋아서 유배 간 것도 아니고 정약종이 죽음이 좋아서 순교한 것이 아님에도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역사서술이 반복되고 있다. 내가 이 페북에 처음 올린 글이 “노론에게는 영원한 길이 있다”였던 것은 이유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노론 세상이 지금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극도의 사대주의 정당인 노론은 조선 임금이 아니라 이미 망한 명나라 임금이 진짜 임금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 구조를 가진 정치집단이었다. 열도로 쫓겨 간 지 70년이 넘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을 아직도 추종하는 이 나라 식민사학자들의 이해할 수 없는 사고구조와 일치한다. 정상인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제 식민사관의 뿌리가 조선 후기 노론사관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1910년 8월, 다급해진 이완용

2017년 8월 29일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지 107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제국의 멸망은 여러 요인이 중첩된 결과였는데 일제의 군사침략이 절대적 요소였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하위 요소로 고종의 무능과 조선지배층의 부패,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권 노론의 매국행위가 있었다. 1910년 7∼8월 경 마지막 노론당수이자 총리대신인 이완용은 다급해졌다. 일진회가 이른바 「합방청원서」를 만들어 “빨리 한국을 합방해 달라”고 일본에 요청했기 때문이다. 자칫 나라 팔아먹은 공을 일진회에게 빼앗길까 두려워진 이완용은 자신의 비서였던 이인직을 1910년 8월 4일 밤 11시에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에게 보냈다. 이인직은 고마쓰에게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전(一轉)하여 일본으로 옮기는 것”라면서 “조선 국민은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그 위치를 향상시키는 일이 될 뿐”이라는 궤변까지 늘어놓았다. 종주국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기는 것이라는 말은 집권당이었던 노론의 합방 당론이었다.

-희희낙낙하는 나라 넘기는 가격

이완용이 이인직을 통해 나라를 넘기면 값을 어떻게 쳐 줄 것인이 물었다. 고마쓰는 이인직에게 나라 파는데 공을 세운 자들은 “공·후·백·자·남작의 작위를 주고 세습재산도 주겠다”는 조선통감 데라우치 방침을 전해주었다.
「이에 고무된 이인직은 “귀하께서 말씀하신 바가 일본 정부의 대체적 방침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관대한 조건이기 때문에 이 총리(이완용)가 걱정하는 정도의 어려운 조건은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이인직의 보고를 들은 이완용이 드디어 합방 추진에 나섰다.(이덕일, 『근대를 말하다』, 88~89쪽)」

-칼자루는 데라우치에게

사나흘 후 다시 고마쓰를 찾아간 이인직은 이완용의 말을 전했다. 이완용은 “병합 조건이 의외로 관대하다면서 이런 방침이라면 병합 실행은 그렇게까지 곤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 너무 오래 끌면 여러 가지 장애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가급적 빨리 실행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 자칫 일진회에게 매국의 공을 빼앗길까 조바심이 난 것이다. 이완용이 서두르자 고마쓰는 “데라우치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와 달리 복잡하게 얽힌 교섭 등은 아주 싫어한다”면서 “요구 같은 말을 꺼내거나 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감정을 해쳐 장래에 불리한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고 말했다. 어떤 요구도 하지 말고 주는 떡이나 먹으라는 뜻이었다. 이완용이 아니라 데라우치가 거래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형국이었다.
-국왕이 아니라 대공으로 하자
그래서 이완용은 데라우치와 만났을 때 단 하나의 조건만 내걸었다. ‘고종·순종지위를 국왕이 아니라 대공(大公)으로 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였다. 대공은 ‘국왕과 공작 사이’의 지위로서 임금이 아니었다. 그러자 데라우치가 오히려 ‘국왕으로 하는 것이 낫겠다’고 대답해서 이왕(李王)으로 결정된 것이다. 일제는 황제였던 고종·순종을 왕도 아닌 대공으로 낮췄을 경우 당사자 및 한국 민중의 반발을 우려한 것이었다. 조선 임금은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노론 당론이 이완용의 입을 통해 다시 확인된 것이다.

-76명의 수작자들

이인직과 나누었던 비밀회담을, 고마쓰는 1934년 총독부기관지 『경성일보』에 「데라우치 백작의 외교 수완」이란 제목으로 공개했다. 그럼에도 교과서는 해방 후에도 이인직을 『혈의 루』를 쓴 선각자로 가르쳐왔다. 『조선총독부관보』 등에 따르면 일제는 1910년 10월 12일 매국 친일파 76명에게 공・후・백・자・남작의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지급했다.
“이들 76명의 수작자(授爵者)들을 분석하면 두 가지 흐름이 발견된다. 하나는 왕실 인사들이다. 가장 고위직인 후작은 이완용을 제외하면 이재완・이재각・이해창・이해승 등 모두 왕실 인사였다. 윤택영은 순종비 윤씨의 친정아버지였고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였다. 또 하나는 사실상 ‘노론 당인 명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권 노론 일색이라는 것이다. 76명 중 소속 당파를 알 수 있는 64명의 당적을 분석하면 남인은 없고, 북인이 2명, 소론이 6명, 나머지 56명은 모두 노론이다(이덕일, 『근대를 말하다』, 93~94쪽)”
-정약용과 노론
조정구·민영달·한규설처럼 남작작위를 거부한 노론 인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회영과 젊은 그들』과 『근대를 말하다』 등의 책에서 나라 팔아먹은 수작자들의 명단을 발표하자 공세가 심해졌다. 이 나라는 아직도 노론 세상이었던 것이다. 이완용이나 이병도가 같은 우봉 이씨인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한 몸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정약용은 고종 때도 공개하지 않았던 여러 묘지명에서 자신의 형 약전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을 ‘악당(惡黨)’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위인이라면서도 그런 위인을 불행하게 만든 정치세력, 즉 노론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다시 말해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반쪽짜리 역사 서술이 지금껏 계속되어 왔다. 최근에는 노론이 개혁정당이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고, ‘한사군=한반도설’, ‘임나=가야설’ 따위의 조선총독부 역사관이 버젓이 행세하고 있다. 근·현대는 진보의 관점으로 본다면서도 고대사는 총독부의 관점으로 보고, 조선 후기는 노론의 관점으로 보는 따로국밥 역사관이 횡행하고 있다. 
광복 72주년,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우리 역사는 여전히 광복되지 못했다. 그래서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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